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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자 충현원 등 록 일 2010년 04월 08일 14:50
제     목 친부모님을 찾아서...

나의 이야기는 41년 전 한국에서 시작된다. 내 쌍둥이 형과 나는 우리가 2살 정도까지 함께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광주에서 태어났다. 나와 나의 쌍둥이 형은 광주 공설 운동장 근처에서 유기아동 혹은 부모를 잃은 아이들로 발견되었다고 들었다. 결국 우리는 한 경찰에 의해 충현원에 오게 되었다. 충현원은 그 후 3년 동안 우리의 집이 되어주었고 우리가 5살이 되던 해 미국인 양부모에게 입양되어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미네소타 외각 지역인 몬티셀로에서 13년간 평범한 청소년기를 보내며 자랐다. 고등학교 졸업 후 나는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둘루쓰 캠퍼스에 2년 반 동안 컴퓨터 엔지니어에 대한 공부를 했지만 그 즈음 나에게는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로인해 나는 공군에 자원하게 된다. 나의 첫 임무는 3년간 오클라호마에서의 영공, 지상간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지속하고 복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첫 임무가 끝난 후 한국으로의 근무 신청을 했고 곧 나는 오산기지에서의 임무를 위해 차출되어 한국에 오게 되었다. 입양 후 처음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어서 나는 무척이나 설레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내가 한국에 왔을때는 내가 그리던 모습으로 흘러가진 않았다. 나의 일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나는 한국에 대해서 한국문화, 한국어를 배울 계획이었다. 하지만 나는 학위를 마쳐야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해서 무언가를 배우기에는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친부모를 찾을 시간도 한국어를 배울 시간도 없었다. 3년간의 한국에서의 근무는 그렇게 빨리 흘러갔고 곧 나는 다음 근무지인 플로리다로 돌아가게 된다.

나는 플로리다에서 officer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했던 학위를 마치기 위해 OTS에 입학하고 졸업 후 9년간 공군의 여러 곳 에서 일을 했다. 늘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었으나 좀처럼 다시 돌아갈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으로의 자원 근무 신청을 다시금 하게 된다.

나는 미국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 10 여 년 전 한국에 왔을 때 하고자했던 일들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1년이 아닌 2년 근무를 자원신청 했던 것이다. 올 여름 나는 어렸을 때 나의 집이 되어주었던 충현원에서 일말의 기억을 찾게 되기를 희망하며 광주 충현원을 방문했다. 그곳에 갔을 때 충현원 식구들과 함께 내가 발견되었다던 광주 공설운동장에 가보기도 했다.

나는 이번 방문이 우리형제가 우리의 친부모를 찾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길 희망한다.

나의 이러한 시도들이 마치 쉬운 시도인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 반대이다. 쉽지만은 아닌 힘들고 어려운 여정의 시작인 것이다. 나와 나의 형에게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 후 나는 우리의 부모님을 찾기 위해 어떤 일이든 다 할 것을 맹세했다. 그 여정이 이렇게도 길고 힘든 일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내가 충현원에 갔을 때 2살 정도로 보이는 아기기 때문에 부모님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나의 이름이 친부모가 지어준 것이라는 것에 무게를 두게 되었다. 처음 충현원을 방문했을때 유혜량 목사님께서 이름 없는 아이들이 충현원에 올때 남자 아니는 ‘충’자를, 여자아이는 ‘현’자를 따서 이름을 지어줬다고 했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입양 관련 기록과 서류엔 한국 이름이 ‘김양수’라 표기되어져 있다.

내가 전에 언급했듯이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친부모님을 찾으려 했던 의도는 충분했으나 실천에 옮길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었다. 나는 TV같은 매체를 이용해서 나의 이야기를 될 수 있는 한 많은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 볼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란다. TV를 본 사람 중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고 나의 잃어버린 인생의 조각 들을 찾아 주길 바라는 희망을 갖고...

어떤 사람들은 이제와서 친부모를 찾는 것에 왜 이리 열성인지 묻곤 한다.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 모두는 시작점이 있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으로부터 우리가 왔다는 것도 안다. 우리 부모님은 또한 우리에게 생명을 준 사람들이며 어떤 면에선 우리의 정체성인 것이다.

나는 나의 정체성을 찾고 있다.

그런 면에서 나의 친부모님을 찾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또한 나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어떻게 살았는지도 알고 싶다. 모든 것이 궁금하다. 나는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이유를 알고 싶을 뿐이다. 그것에 대한 진실은 중요하다. 또한 내 친부모를 찾는 것은 내 인생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무수히 많은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는 마침표(종지부)를 찍는 것이다.

고아원에 살았거나 집 없는 아이들...나와 같은 처지에 있던 아이들은 그분에 의해 구조되어 오늘날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살아 갈수 있게끔 만들어 준 분에게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이 자리에 왔다. 그는 전쟁으로 분열된 나라의 많은 기아, 유기아, 미아들을 구하는 것이 자신의 안녕과 자신의 인생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셨던 Champlain Russell Blaisdell이다. 그의 영웅적인 행동들은 고아원의 mission이자 희망과 무욕의 상징이다. 만약 그가 그러한 용기와 동기를 갖지 않고 나와 같은 아이들을 구하지 않았다면 모든 희망은 꽃망울을 피우기도 전에 시들어 버렸을 것이기에 오늘날 나의 성공을 Chaplain Russell Blaisdell께 돌린다. 그는 고아원에 살았던 모든 아이들의 희망을 상징한다.

시간이 흘러가면 갈수록 나의 친부모를 찾고 싶은 마음은 더해진다.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 갈수록 나의 친부모님을 찾을 기회는 점점 줄어들면서 말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나의 정체성을 찾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또한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들을 찾는다는 것은 본능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결국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의 한 일부인 것이다. 가족간의 끈끈한 연대성을 찾아 그분들과 함께하고 싶다.

만약 나에게 영광스럽게도 부모님을 만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나의 꿈이 실현되는 것이리라. 그들에게 나에게 있어서 그들의 소중함을 얘기 하고 싶다.

친부모와 오랫동안 헤어져 살면서도 나는 한시도 그들을 잊은 적이 없다. 나의 부모님을 찾았을때 나는 그들과 나의 삶을 공유하고 싶고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살았으며 어떤 경험들을 했는지 그것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행복했는지 슬펐는지 모두 다 얘기하고 싶다. 나는 또한 그들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알고 싶다. 우리에겐 극복해야 할 것들은 많고 시간은 턱 없이 부족하다. 이 시점에서 얘기 하긴 어렵지만 나의 소망은 그들과 함께 나의 인생을 그들의 인생을 나누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가족’이 되는 것이다.

• 첨부파일 : 김상희(성춘자)뿌리찾기.jpg (Dow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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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음 글 김양수씨 힘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