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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자 충현원 등 록 일 2013년 01월 15일 16:55
제     목 <광주전남여성운동사25>전쟁고아 위해 사회복지시설 세운 박순이

   
▲1950년대 광주 남구 양림동 충현원 전경모습.

   
▲1955년 설립자 박순이 선생이 원생들과 움직이는 장난감 기차를 즐기고 있는 모습

매서운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을 더 시리기 지내야 했던 시절. 6.25로 인해 우리나라는 폐허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곳에 정착하고 재도약을 하기 위해 버려진 아이들을 수용해줄 따뜻한 곳이 시급했다.

바로 광주 남구 양림동 사직공원 부근에 위치한 충현원(忠峴院)이다. 이곳은 국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보육원으로 1952년 박순이(1921~1995) 선생이 설립한 곳이다.

폐허가 된 삶의 터전을 회복하고자 사회복지사업을 발판삼아 고아원, 보육시설 설립 등 여성들의 지위향상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온 박순이 선생의 일대기를 재조명해본다.

격동의 시절, 전쟁고아 수용시설 필요

   
▲故 박순이 선생의 젊은 시절 모습.

오래전 광주 시민들의 관심에서 잊혀져갔던 충현원은 개원 60년 만에 복원공사를 실시해 지난 2012년 새롭게 재탄생 했다.

60여 년 전 우리 민족은 6.25 전쟁으로 인해 격동의 시기를 겪고 먹을 것, 입을 것 없이 지내야했다. 그 당시는 남편을 잃고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절박함 속에 버려진 아이, 부모 잃은 고아들이 늘어나 구호의 손길이 필요로 했다.

그런 아이들을 돌보는 보육시설이 절실한 때였다. 충현원을 설립했던 박순이 선생은 1921년 1월 18일 무남독녀로 광주 양림동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독립운동가와 함께 지내왔던 박태삼씨였으며, 어머니는 선교사들과 함께 어린아이들을 보살피는 박애신씨로 선진적인 가정 환경 속에서 자라왔다.

그녀의 어머니는 7명을 자녀를 두었던 우월순(윌슨) 선교사 댁에서 직접 재봉질을 하여 아이들의 옷을 만들어주며 함께 지내왔다. 이로 인해 어머니를 따라 선교사 자녀들과 함께 자라온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영어를 쉽게 배우게 된 계기가 됐다.

한편 당시 박 선생의 집은 현재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대강당 자리에 위치한 곳에 있었다. 우월순 선교사의 임시 사택과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한울타리에서 함께 지내온 이유이기도 하다.

현재 충현원이 1920년대 우월순 선교사의 임시 사택이었던 것이다. 사직공원을 따라 사진으로만 봤었던 60년 전 충현원을 머릿속에 그리며 발걸음을 옮겨 나갔다. 새롭게 복원된 충현원은 본래의 뼈대를 두고 역사가 살아 숨 쉬는 듯 한 깨끗한 한옥으로 탈바꿈했다.

   
▲남구 양링동에 위치한 충현원은 박순이 선생이 생을 마감하고 방치되었지만 지난 2012년 60년만에 새롭게 복원했다. 충현원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보육원이다.

   
▲광주 남구 양림동에 위치한 충현원에서 만난 박순이 선생의 하나뿐인 며느리 유혜량 목사와 뒤에는 박순이 선생이 직접 치셨던 풍금

묵묵히 본인 일 지켜온 신여성

그곳에서 만난 박순이 선생의 며느리인 유혜량 목사는 “당시 시어머니와 함께 자라왔던 우월순 선교사의 장녀를 만나게 되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며 “그분은 어느덧 104세가 되셨는데 아직도 박애신과 박순이를 머릿속에 또렷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는 담화를 나눴다고 한다.

   
▲당시 1990년 故박순이 선생의 생전 모습.
박순이 선생은 어린 시절부터 피아노와 노래에 소질 있었으며 선교사에게 한글 말을 가르치기도 하며 선교사들이 세웠던 수피아여학교를 다니게 됐다. 하지만 그녀는 당시 신사참배 거부로 수피아여학교가 폐교되면서 졸업을 하지 못하게 됐다. 이후 그녀는 학업을 끝까지 이어가기 위해 전남보통여자학교(현재 전남여고)를 다니고 졸업장을 얻게 됐다.

박순이 선생의 생전을 떠올린 유 목사는 “시어머니가 어렵기도 했지만 당신의 함량에는 절대로 미칠 수 없는 분이셨다”며 “어머니는 초창기 YWCA에서도 활동하셨지만 회장직과 상을 주려고 해도 거부하셨고 묵묵히 본인의 일을 하셨던 신여성 중에 신여성으로 너무나 존경스럽다”고 말한다.

이후 박 선생은 목포고등학교에서 음악 선생이었던 성악가 김생옥과 1944년 결혼하고 신혼 생활을 해나갔다. 하지만 김생옥 선생은 1947년 5월 1일자로 순천여학교로 발령이 나고 잠시 순천에서 지내다가 1948년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으로 인해 목숨을 잃게 됐다.

남편의 죽음으로 슬픔을 겪은 그녀는 어린 자식만 남겨두고 생활고에 부딪쳐 “이제 어떻게 살아가지...?”라는 생각에 막막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순사건 이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선교사들은 미국으로 떠났고, 우월순 선교사가 같이 미국으로 가자는 권유를 하게 된다.

어린 과부, 버려진 전쟁고아 돌보아

   
▲1950년대 초반에 쓰던 충현원 간판

하지만 박순이 선생은 한국에 남아 아무도 돌보지 않는 젖먹이 고아들을 돌보겠다고 결심을 하고, 1949년 우월순 선교사의 사택에서 45여명의 고아를 돌보던 것이 계기가 돼 1952년 ‘충현영아원’을 설립하게 된다.

당시 일본인이 운영하던 ‘무등원’이라는 고아원이 있었지만 젖먹이 영아들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박순이 선생이 더욱 나서게 된 이유가 됐다.

한편 그녀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지만 “내가 아니면 버려진 전쟁 고아들을 돌보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인구가 없어지면서 미래를 이어갈 수 없어”라는 생각을 갖고, 보육 사업을 이어가며 선구적인 생각을 지녀왔다.

이후 충현원은 수백명의 전쟁 고아들의 수용시설이 되고, 그녀의 박애사상으로 지난 1981년에는 호남사회복지관을 개설하기도 했다.

유 목사는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본인의 이야기를 잘 하시지 않으셨지만 충현원에서 밤낮으로 아이들을 꼭 껴안고 스킨십을 하며 사랑으로 돌봐야 한다는 것이 어머니의 철칙이셨다”며 “광주 100년사를 쓰셨던 박선홍 선생님께서도 20세기에 서서평이 있다면 21세기에는 박순이가 있다라고 말하셨고, 그 연배 지식인층 사이에서는 ‘광주의 누님’이라고 불리셨다”고 존경을 표했다.

   
▲생전 박순이 선생과 박순이 선생의 어머니인 박애신 여사가 직접 쓰던 재봉틀

이후에도 박순이 선생은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아동상담소, 가출청소년을 위한 보금자리, 어린이집, 무료불우아동병원을 운영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된다. 또한 사직공원에 최초로 어린이 놀이터가 준공되도록 열과 성을 다하기도 하셨던 분이다.

하지만 박순이 선생은 1994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난소암 판정을 받고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유혜량 목사는 “어머니는 나라를 위해 본인을 희생하셨던 애국자이셨고 눈감기 전에는 백두산을 가보고 싶다고 말하셨다”며 “하지만 세상을 떠나시기 전 ‘너를 향하신 하느님의 뜻을 날마다 여쭙고 살아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하셨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유 목사는 시어머니를 생각하며 ‘충현원’을 더욱 애틋하게 이어오고 있는 듯 했다.

결국 1995년 2월 1일 박순이 선생은 7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이렇듯 갈 곳 잃은 전쟁고아들에게 따뜻한 둥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었던 그녀는 여성과 아동을 위한 사회복지시설을 설립하며 사회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섰던 선도적인 여성관을 다시 돌아보게끔 만든다./김다이 기자
   
▲남구 양림동 충현원 마당에 있는 김생옥, 박순이 선생의 기념비석

김다이 기자  |  -08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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