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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 성 자 충현원 등 록 일 2017년 12월 23일 12:04
제     목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0. 봉선화야 너는 아느냐 - 역사에 묻힌 아픔, 억울한 피해자들 명
[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20. 봉선화야 너는 아느냐 - 역사에 묻힌 아픔, 억울한 피해자들 명예 회복해줘야성악가 김천애, 일제 때 동경 음악회서 '울 밑에 선 봉선화' 열창…갖은 고초 속 계속 노래·따라 부른 민중도 탄압 / 성악가 김생옥, 여수 순천 사건에 휘말려 처형 직전 '봉선화' 불러…감동한 지휘관 중지 신호 착각한 부하 방아쇠 당겨
기고   |  desk@jjan.kr / 등록일 : 2017.10.26  / 최종수정 : 2017.10.27  13:50:23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는 장면이 있다.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주인공 유태인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독일 장교가 듣고 진심으로 감동하여, 그를 체포하지 않고 그대로 나가는 장면이다. 가끔 쇼팽을 들으면 그 장면이 애잔하게 떠오른다. 그 영화 속 독일군 장교와 피아니스트의 이야기는 해피앤딩이었지만, 우리에겐 그 사연과 비슷하지만 결과가 달랐던 새드앤딩의 사연이 있다.

울 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 적에 /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 어언간에 여름 가고 가을 바람 솔솔 불어 /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 낙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양이 처량하다

봉선화(鳳仙花, 봉숭아)를 아름답고도 처량하게 그린 노래 ‘울 밑에 선 봉선화’는 한국 가곡의 효시로 꼽히는 곡이다. 1920년 작곡가 홍난파가 ‘애수’라는 곡으로 발표한 후, 1925년 김형준이 가사를 붙인 노래이다. 일제강점기 당시 이 나라와 민족의 신세가 처량한 봉선화와 같다는 비유를 그리고 있다. 3·1 독립운동 이후 1920년대의 이 시기는, 더욱 삼엄해지고 악독해진 일제의 강압으로 인해 백성의 삶은 하루가 다르게 고통에 젖어만 가던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 민족의 말로 다 할 수 없는 시련과 한숨 속에서 독립을 염원하며 봉선화를 빗대어 부른 이 노래는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듯 구전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 소프라노 가수 김천애와 봉선화.

알음알음 불려왔던 이 노래가 널리 퍼져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게 된 계기가 있다. 1942년 소프라노 가수 김천애(당시 23세)가 일본 동경의 히비야 공회당에서 열린 음악회에서 독일가곡을 부른 후 앵콜송으로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부른 때부터이다. 공연이 끝나자 청중들의 박수갈채가 떠나갈 듯했고, 동포들은 무대 뒤로 찾아와 김천애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그 이후부터 귀국한 김천애는 무대에 설 때마다 한복 차림으로 이 노래를 불러 청중들의 심금을 울렸다. 일제는 가창 금지는 물론 음반판매도 금지시키며 당시의 블랙리스트로 만들었다. 김천애는 일제 경찰에 여러 차례 잡혀가 모진 고초를 당하였고, 일제는 ‘울 밑에 선 봉선화’노래를 부르기만 해도 붙잡아가곤 했다. 실제로 ‘울 밑에 선 봉선화’를 불렀던 학생들을 잡아다가 의자에 묶어 놓고 집게로 혀를 뽑아서 죽인 일이 있으며, 그 수가 밝혀진 것만 해도 386명이었다고 전해진다.

  
▲ 성악가 김생옥 선생과 봉선화.

그 봉선화의 노래에 관한 사연 가운데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독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가 한 가지가 더 있다. 여수 순천사건으로 희생이 된 故김생옥 선생의 사연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성악가 김생옥과 유명 피아니스트 박순이와의 결혼은 1944년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행복하기만 할 것 같았던 이들의 결혼생활은 4년 만에 한 사건에 휘말린다. 1948년 10월에 일어난 여수 순천 사건의 비극으로 인해 남편 김생옥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박순이가 불과 27세 때의 일이다.

사건을 재구성해보면 이렇다. 결혼 후 유럽으로 함께 유학을 준비하던 김생옥(당시 30세)은 1948년 10월 광주 동방극장에서 순천여학교 제자들과 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음악회 장소였던 동방극장에서 영화가 절찬리에 상영되어 음악회를 3일만 연기하자는 연락이 왔고, 연기한 그 날 사이에 여수 순천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순천여학교 120명 중 20명만 살아남았다고 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기에 제자들이 걱정된 김생옥은 아내에게 “금방 갔다 올게. 아무 일도 없을 것이오.”라는 말을 남기고 순천으로 떠났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가 마지막 작별이 되고 말았다.

사건에 휘말린 김생옥이 체포되어 1948년 10월 31일 순천시 죽도봉 골짜기에서 경찰에 의해 총살된 것이다. 나중엔 알려진 바에 의하면 처형되기 직전 김생옥은 “내가 성악가인데 노래 한 곡 부르고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며 ‘울 밑에선 봉선화’를 불렀다고 한다. 이내 김생옥의 노래에 감동한 사형 지휘관은 “노래를 잘 부르는 인재이니 죽이지 마라.”는 의미로 손 신호를 보냈으나, 안타깝게도 이를 “빨리 죽이라.”는 신호로 오인한 부하들이 방아쇠를 당겨 그만 총탄을 맞고 말았다는 새드앤딩의 이야기이다. 소식을 들은 박순이는 순천으로 달려갔지만, 남편의 시신을 찾지 못했다. 한꺼번에 사살된 시신들이 죽도봉 골짜기에 뒤섞인 채 그대로 매장되었기 때문이다.

4년 만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홀몸으로 3살 된 아들과 8개월의 딸인 두 아이를 키우게 된 박순이는 앞날이 캄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고인이 된 박순이는 자손들을 잘 키우며 오히려 세상을 위해 봉사하고 더욱 열심히 살며 사회복지활동을 이어갔다. 봉선화 같은 꽃다운 나이에 처량했을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세상을 품었던 그 마음이 헤아려지지 않는다. 어찌 그 아픔이 이 사연일 뿐이랴만 무고하게 희생된 많은 이들의 억울함이 한이 된 채 우리의 시간 속에 남겨져 있다.

이제, 새 정부가 들어서며 우리의 역사에 남겨진 일제강점기 일제의 만행은 역사와 기억으로 전승되고, 제주의 4.3사건도 재조명되고 있고, 동학농민혁명의 뜻을 기리고, 5.18 광주항쟁도 옳게 보듬어 주고 있다. 하지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남겨진 가족으로 고통을 겪은 이들의 마음을 어찌 헤아릴까. 제주 4.3 사건의 진압을 거부한 군인들에 의하여 여수 순천사건이 일어난 지 이제 69년이 지나 내년이면 70주년이 된다. 올해, 10월 19일 그 날도 어김없이 다가왔지만 아픔을 아우를 이렇다 할 이슈도 못 만들고 역사의 더걱거리는 더께가 된 채 또 지나갔다. 이제는 순천 여수사건에 의하여 무고하게 피해를 본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을 해 주어야 한다. 억울하게 휘말려 희생을 당한 민간인들과 가족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억울함을 풀어주고, 그들의 가슴에 멍울로 남아있는 깊은 아픔과 한을 치유해 주어야 할 것이다. 김생옥 선생, 그가 시월의 마지막 날에 불렀던 ‘울 밑에 선 봉선화’ 노랫말처럼 말이다.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 형체가 없어져도 /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 화창스런 봄바람에 회생키를 바라노라

봉선화의 꽃은 지면서 봉긋하게 열매를 품어내 씨앗을 투두둑 뱉어낸다. 그 힘에 씨앗은 튀어나와 주변에 자리 잡고 다음 해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온다. 봉선화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고향 누이 같은 꽃이다. 친숙한 민족의 정서를 지닌 봉선화는 역사의 굴곡과 함께 노래로 이어져 왔고, 전해지는 이야기로 첫눈이 오기 전에 봉선화를 물들인 흔적이 손톱에 남아있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그 마음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선연한 아픔으로 남아있는 일들도 이제는 잘 헤아려 역사 앞에 오명을 씻고 회생하기를 기원해 볼 일이다.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故 김생옥 선생의 아들은 훗날 전북 익산 출신의 아내와 일가를 이루었다. 이들 가족은 다른 피해자 가족과 더불어 시신도 수습 못 한 아버지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남아있는 자들의 아픈 시간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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